수화는 재희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방긋 미소지었다. 수화의 미소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이전보다 제 속내를 더 꼭꼭 숨기는 것 같았다. 재희 또한 수화에게 초조한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무표정을 유지했다. 수화를 꺼내주는 조건은 크지 않았다. 재희 자신도 수화가 가는 곳에 함께 데려다 달라는 것이었다. 수화를 그냥 풀어주기만 하면 불안할뿐더러 수화가 ...
재희는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수화의 물거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가늘고 투명한 것이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수장을 향해 힐끔 시선을 돌렸지만, 수장은 수화가 멀어지든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먹잇감을 잡았으니 다른 초식동물을 쫓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맹수처럼. 수화의 물거품을 눈짓으로 대충 훑은 수장은 피식 웃으며 초에 손짓해 불을 피웠다. [...
동굴의 새하얀 벽은 수장의 비늘 색이 섞여 새롭게 탄생하는 빛을 선명하게 반사했다. 수장은 자신이 오래된 존재라는 걸 과시하듯이 낡고 부스러진 걸상 위에 옆으로 누워 곧게 펴진 꼬리지느러미를 펄럭거렸다. [보아하니 너는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가졌군. 수화가 장난질을 쳤나 보지? 이름이 뭐냐 아이야. 계속 길게 부를 순 없으니.] 수장의 초음파는 걸걸하고 ...
수화가 제게 뿜어대던 물거품이 인어들의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수화가 다른 인어에게 불려가자마자 그에게 몰려온 인어들은 바다처럼 푸른 비늘을 가진 인어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며 여러 이야기를 건넸다. 역겨운 인어들의 냄새를 깊게 맡고 싶지 않아 인어들 사이로 빠져나가 얼굴을 찌푸린 재희는 수화가 했던 행위라도 알아볼까 싶어 인어...
물고기들조차 닿지 못하는 곳이 있다. 심해어마저 발길을 돌리는 곳, 강력한 수압이 전신을 누르는 새까만 심해. 바다의 끝에 흐릿한 색색의 불빛이 주변을 밝혔다. 인간의 퉁퉁 부은 시체가 영양분이 되어 점점 분해되면 인간의 익사체 안에서 어린 인어가 시체를 찢고 태어난다. 상처를 입은 인어나 재능이 없는 인어는 어린 인어를 육성하고 키우는 양육 담당이 된다....
재희는 돌아오지 않는 하진을 한참 동안 기다렸다. 모르는 새에 새로운 전문가가 하진의 빈자리를 메웠다. 새 전문가는 인중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머슴 같은 거대한 몸집의 남자였다. 재희는 새 전문가가 그렇게 맘에 들진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묻자 남자는 하진이 며칠간 투옥됐다고 할 뿐 정확한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 "어째서 낚시하고 있었던 거예요? 지...
수화는 까끌까끌한 제 입천장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수화의 손에는 지문이 없었다. 오랫동안 물에 불어 닳은 것처럼. 수화는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으로 재희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재희는 수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마워요, 구해줘서." "그 얘기는 하진이한테 해요.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상처가 심해졌을 테니까." 하진이 그렇게 열중...
하진은 수화에게 얼마 남지 않은 럼주를 건넸다. "마셔요. 소독약 대신이에요." 수화는 한참 의심스러운 눈으로 하진을 훑어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병 채로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입천장이 홧홧해지며 목이 타는 듯 괴로웠다. 병을 서둘러 집어던진 수화는 본능적으로 드러난 옆구리의 아가미를 재희의 옷으로 가렸다. 아가미에 옷감이 쓸려 욱신거렸다. 하진은 익숙하게...
재희는 가슴 속을 가득 채운 흥분이 표면 위로 떠오르기 전에 표정을 감추었다. 상처가 더 벌어지라고 이대로 낚싯바늘로 여자의 얼굴을 찢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었지만 바다가 너무 가까웠다. 재희는 이 여자를 죽이는 동안 보지 못할 바다를 한 번 더 눈에 담고는 여자를 땅 위에 내려놓고 낚싯바늘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이런, 괜찮으신가요?" 여자는 ...
아주 먼 옛날, 세이렌이 모티브가 된 바다의 괴물이자 최상 포식자, 인어가 푸른 바다를 뒤덮을 것이라는 해묵은 예언이 하나 있었다. 바다를 인어가 메우기 전까지, 예언은 허언으로만 여겨졌다. 사람들은 바다를 통해 많은 곳을 오가고 자원을 쟁취하며 마치 바다가 자신의 것이란 듯이 다퉜지만 바다의 분노에는 여전히 당해내지 못했다. 파도가 몰아치면 배가 흔들리고...
넌 이별의 계절에 나를 만났다. 붉고 노란 것들 사이로 발갛게 익은 도톰한 양 귓불이 의미 없이 내 눈에 들어왔다. 너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인연은 낡고 오래된 것이었다. 네가 날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아직 명랑하던 스물의 청년으로 되돌아간다면 너를 조금이라도 아는 체 했겠지만 나는 시간을 받아들였고 입가 주름이 깊어...
이계에 어떤 생물이 살고 있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 뿐이야. 그러니까, 진짜로 이계에 또 다르게 진화한 인간이 있을 수도 있고, 이계로 가는 터널은 문 드립으로 만들 수 있고, 우리의 상식에 벗어난 인간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이미 모두 다 알고 있잖아? 그...
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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