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 수화의 아가미 위에 덮여있던 수건이 완전히 말라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본능적으로 갈증을 느낀 수화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새 다리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꼬리를 꿈틀거리던 수화는 밤새 물 밖에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벌떡 앉았다. 하지만 인간의 다리가 아니었기에 고장 난 오뚜기처럼 수화는 도로 널브러졌...
태양이 어느새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수화가 앉아 있는 욕조 위 작은 창문 사이로 새어 나온 붉은 빛이 수화의 까만 머리를 붉게 물들였다. 입마개가 풀리자 잔뜩 신나 입을 크게 벌렸다 다물던 수화는 한율이 천으로 된 무언가를 건네주자 이리저리 흔들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옷이라는 거야. 불편하겠지만 여기엔 나만 들락날락하는 게 아니거든. 내 침구를 정리해주...
인어는 보통 사나운 게 아니었다. 성으로 옮기기 위해 꺼내는 과정에서 직원을 물어 입에 마개를 채울 정도였다. 한율은 인어를 거칠게 다루지 않을 것을 명령하고 스스로 말 위에 올라타 수조를 마차 안에 두었지만, 마차에 들어가는 이동용 수조가 너무 좁고 마차가 흔들리는 탓에 수조에서 인어가 이리저리 부딪치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 한율은 제가 몰고 있는...
낯설고 깊은 물 속의 침묵이 수화를 감쌌다. 온통 어둡고 사방이 어지럽게 흔들려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수화는 자신을 가둔 단단한 벽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칼하고 똑같은 냄새가 나는 이것이 대체 어디로 가는지 멋대로 추측해보았다. 이대로 도살장에 던져져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걸까? 내 비명을 감상하며 낄낄 비웃겠지. 미친놈들. 수화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짙은 어둠의 바다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흰 기포를 제외한 그 무엇도 색을 가지지 못했다. 밤바다는 소리가 온 세상을 지배한다. 색이 사라진 빈자리를 가득 메우는 파도소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묻고 쓸어가 버릴 듯 매섭고 강렬했다. 이런 밤이 되면 인어들은 가끔 바다 위로 올라와 모래에 몸을 비비거나 달을 구경한다. 인어에겐 강한 햇빛보단 짙은 어둠이 익숙하기...
그해 겨울, 바다가 온통 새빨간 핏빛으로 물들었다. 물고기들은 피를 피해 달아났고 바닷물은 평소보다 염분이 올라갔다. 그 해엔 가을에도 이런 적이 한 번 있었다. 먼바다에서 붉은 피가 흘러들어오고 인어의 사체가 물거품이 되어가며 떠다녔다. 하지만 겨울과 견줄 정도는 못 됐다. 깊은 바닷속에서 부글거리며 피어오른 혈화는 점점 번져 물 위를 새빨간 막처럼 덮었...
얇고 가냘픈 널빤지 위에 홀몸으로 선 것은 가난한 집안 형편을 생각한 가련한 처자의 희생이거나, 지긋지긋한 현실에서부터의 도주는 아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강한 파도에 휩쓸려 모래사장 위에서 파닥거리다 죽은 여름 물고기처럼 도태된 것도 아니었다. 마침내 고기잡이배 위에 올라탄 나의 등 뒤에서 어렴풋이 들리던 엄마의 청도 나는 듣지 못한 척 무시했...
병영에는 병사들의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깊은 어둠이 육지에 내려앉아 홰에 붙은 불만이 주변을 밝혔다. 덜덜거리며 포장되지 않은 뒷길로 큰 수레 하나가 구르며 다가왔다. 수레 위는 붉은 모피에 덮여 안에 무엇이 실렸는지 전혀 볼 수 없었다. 수레를 끌고 가는 굵고 단단한 누군가의 손이 목책을 손으로 가볍게 쓸듯이 두드렸다. 곧 병영 입구에서 사환 여러 ...
수백 년간 이어진 인어와 인간의 줄다리기 속에서 승리의 신은 인간에게로 점점 저울을 기울였다. 인어의 개체 수는 유독 줄어들었고 간혹 물거품이 되어가는 시체를 사냥꾼이 건져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에 대해서 육지 사람들의 입에선 많은 얘기가 오갔다. 바다의 마녀가 부린 마술이다, 인어들이 자기들끼리 뜯어먹으면 패싸움을 벌였다, 어느 소문이 더 사실에 가까운지...
메리에게 수장살해사건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메리도 알고 있었다. 자신과 똑같은 시간대에 태어난 인어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본래라면 노래 실력과 힘을 겨루어 수장 자리를 정하는 게 옳지만, 메리가 선별된 이유는 전년 대비 인어의 수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태어난 인어만큼이나 죽은 인어도 많다는 것이다. '메리. 당신이 올해 안에 범인을 잡지 못...
수장의 사망 소식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바다는 거칠어졌고 폭풍이 치기 전에 새로운 오래된 인어가 수장 자리에 서며 소란은 잦아든 것 같았다. 새로운 수장은 젊은 여자의 모습을 벗고 늙은 여자의 모습으로 인어들 앞에 섰다. 여러 해역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수장이 인사를 하는 순서가 돌아와 드디어 새 수장과 마주쳤을 때, 수장은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그런지 조금...
바다 위에 아무리 거대한 바윗돌을 집어 던진다 해도 파문이 일었다가 잠잠해질 뿐, 바닷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바윗돌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는 걸 알 수가 없다. 수화가 사라진 인어사회도 그랬다. 수화가 도망쳤다는 이야기에 한창 수화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다가 어느새 처음부터 없는 사람처럼 모두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재희는 수화와 헤엄쳐간 먼 거리의 바닷...
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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