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은 먹구름이 낀 마냥 어둑어둑했다. 강한 산성비가 내리려는 모양이었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너진 정부청사의 허름한 잔해 사이로 기어들어 비를 피했다. 저 비를 맞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신인류' 뿐이었다. 그들은 마치 앞으로 인류에게 나타날 모든 재앙에 적응할 듯한 신체구조로 묵묵히 거리를 걸어 다녔다. 온통 습기로 가득 차 눅눅하고 찐득찐득...
세상은 언제나 앞으로 움직이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것은 시간이란 규칙으로 인한 본능적인 전진인데, 나는 아직 시간의 근본까지 알 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세상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세상이 후퇴하고 있다고들 하는데, 그것을 뒷걸음질이라는 쉬운 단어로 바꾸고 나면 역시 내 생각이 맞다는 확신이 든다. 그것은 뒤로 가는 전진. 세상이 움직이...
유독 발이 무겁게 떼이는 날이었다. 지영은 아스팔트 위를 발로 느리게 두드리며 걸어갔다. 발치에 치인 맥주캔이 날아가 구르는 소리가 유달리 맑았다. 시장이란 장소가 보통 그러하듯 복잡하고 이런 저런 샛길이 많은 법이라지만 지영의 걸음에 주저는 없었다. 지영이 멈춰선 곳은 골목 안에 위치한 낡은 미용실이었다. 허름한 간판엔 '윤자 미용실'이라는 문구가 적혀있...
보석의 비가 내린 밤이었다. 성스러운 재물의 탐욕을 삼키려 입을 벌렸지만 혀를 타고 흐르는 것은 작은 물방울뿐. 난 빛 내린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구름은 잡히지 않는 꿈의 허상인 것처럼 검게 타들어 갔다. 저 구름을 태우는 것은 태양, 거대한 꿈의 불. 내가 꿈꿔온 것들아. 너희는 품을 허락한 적이 있나. 나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긴 우울을 빠져나와 맞...
창밖에는 밤비가 내린다. 마당 밖은 온통 부산스러웠다. 모르는 장정들이 집을 들락날락, 먼발치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보였다. 아씨는 조금 벌린 창문은 닫았다. 문창지를 두드리는 겨울 바람이 매서웠다. 비는 말없이 무릎을 꿇고 하석에 앉아 아씨를 몰래 훔쳐보았다. 아씨의 표정은 그저 덤덤했다. 바닥에는 언년이가 가져온 꽃다운 옷들이 마구 너질러져 있었다. 비는...
미미가 죽었다. 분명 어제까진 곁에 있었는데, 곁에 누워있었는데. 한참을 앉아있었던 것 같다. 목 안을 차가운 것이 막았다. 처음엔 내가 담담한 줄 알았다. 그날도,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회사에 출근했고 일 능률도 나쁘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왔을 때, 습관적으로 현관문을 재빠르게 닫다가 불현듯 울음이 터진 것 같았다. 문을 열어둬도 뛰쳐나갈...
오래전부터 바라왔던 것이 있다. 기다리고 염원해왔던 것. 남쪽 나라에 가는 일이다. 무완은 말없이 발코니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세간에 도는 무완에 대한 소문이 아주 거짓은 아니다. 사생아가 아니라 정확히는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 전 부인에게 태어난 딸이다. 반란 과정 중에 부인은 암살당했고 창 씨 왕조가 세워졌다. 무완은 왕권이 안정될 때까지 하인인...
분해한 인어 사체를 수레에 실은 해부전문가들이 뒷길로 걸어갔다. 포장되지 않은 길 탓에 수레는 끊임없이 덜컹거렸다. 슬슬 새 수레를 사야 한다며 남은 럼을 들이켜던 해부전문가들은 뒷문으로 나오는 사람의 인영과 마주해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자기도 모르게 익숙한 뒷문으로 나와버린 하진은 서둘러 눈동자를 굴러 신분을 확인했다. 말단 해부전문가들이다. 북쪽 나라...
왕녀가 떠나고 낮은 웅성거림만 남은 연회장 안은 곧 하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하진은 그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다. 말을 여러 차례 가려서 뱉을 뿐, 사람과 멀어지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왕의 무책임한 보류에 기분이 안 좋아졌지만 한율이 제게 손을 내밀어준 것은 내심 기뻤다. 하지만 그 기색을 표출할 수 없을 만큼 걱정됐던 게 바로 이런 반응이었다...
한율의 시녀 자리를 노리는 몇몇 귀족 부인들이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한율을 따라가 가벼운 말을 걸었다. 이미 연회에 대한 흥은 떨어졌지만, 그의 기분을 돋워주려는 부인들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들으며 한율은 미소를 되찾았다. 한율이 완곡하게 거절한 왕자들은 다시 다가오진 않았지만 한율을 둘러싼 긴장감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또래의 귀족 아이와 신나...
19년 전, 인어를 죽이기만 했던 이 손으로 처음 치료한 여자가 있었다. 하진은 그때의 희망을 2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잊은 적이 없다. 생명을 살리고 공평히 여기는 자애롭고 영리한 의사가 되고 싶다. 그 꿈은 인어를 실제로 해부하는 현장 업무에서 벗어나며 점점 가까워지는 듯하면서도 절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첫 번째 환자가 19년 전과 전혀 다르...
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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